일의 방식에 관해: 회피로서의 농업근면성

형식으로 불안을 덮다
INOH JUNG's avatar
Feb 05, 2026
일의 방식에 관해: 회피로서의 농업근면성
🎲
효율적인 업무 방식에 대한 개인적인 고민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농업근면성이란 농사짓듯 묵묵히 씨를 뿌리고 가꾸는 성실함을 의미하지만, 일하는 방식으로서의 농업근면성은 마냥 좋은 것은 아니다. 논밭에서 땀 흘리는 근면함 그 자체를 비꼬려는 건 아니다. 문제는 근면함이 ‘업의 본질’을 대신해버리는 순간이다.
 

근면함이 아니라 ‘회피’가 굴러가는 조직

리더가 일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한 사고 과정 대신, 노동량과 형식으로 마음속 안전지대를 만들면 조직은 급속도로 방향성을 잃게 된다.
  • 보고서는 많을수록 좋은 것
  • 문서는 상세할수록 좋은 것
  • 분류는 세분될수록 좋은 것
 
이것을 꼼꼼한 리더의 특징이라고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것이 과도하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불안을 노동으로 덮는 습관이 아닌지.
더 큰 문제는, 보통 이러한 유형의 리더의 경우 이 습관을 고치려는 생각이 없다. 오히려 그렇게 해야 일을 잘한다고 믿는 확신이 있다. 즉, 개선의 여지가 아니라 신념이다.
 

전형적인 농업근면성 케이스

1) 거절한 제안/드랍한 회사까지 검토 요약본을 쓰게 하는 문화
이미 거절한 제안이나 기업 검토 건도 굳이 분석 과정을 수행하고 이를 1페이지 요약본 등 보고자료를 만들도록 한다. 여기에 “왜?”라는 질문과 그 답은 없다.
이것이 어떠한 의사결정에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니다. 그저 ‘일을 했다’는 착시만 남을 뿐.
 
2) 파란색을 빨간색으로 바꾸는 데 에너지를 쓰는 방식
예컨대 실무자가 PPT를 만들면, 내용보다 자료의 색상 같은 형식에 먼저 시선이 간다. 이후 파란색을 붉은색으로 바꾸라는 식의 지시가 길게 이어진다. 그걸 관리의 핵심처럼 다루는 태도는 덤이다.
정작 핵심 질문—“이 슬라이드로 의미가 전달되며, 상대방은 어떤 결정을 내릴 수 있나?”—는 없다.
유사한 케이스로는 “보고 문단을 5문장에서 3문장으로 줄여라”는 류의 지시도 있다.
보고와 의사결정 과정에서는 요약이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단지 5문장에서 3문장의 차이가 의사결정 속도를 올리는 방식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진심으로 회의적이다.
 
3) 인간 매크로와 ERP 출력 장인
ERP를 전수 열람하고 문서를 하나하나 PDF로 다운로드하고, 다시 이 파일들의 이름을 가나다순으로 바꾸고, 폴더를 정렬하는 일에 조직의 체력이 들어간다. 그리고 나서 이걸 “정리”라고 부른다.
그러나 실상은 정리라는 이름의 노가다이다.
정리의 목적이 “검색 가능성”이라면 시스템을 바꾸면 되는데, 시스템은 그대로 두고 사람만 갈아 넣는다.
 
4) “굳이 왜 금액으로 환산하지?”
회사의 갖은 활동 항목을 “금액으로 환산해보라” 지시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회사의 경제성 분석을 위해 필요할 때도 있지만, 문제는 ‘외주를 맡긴 회사의 직원들의 노력분’ 같은 환산 작업이 불가하거나, 환산 자체가 의미 없는 경우에도 지시가 내려진다는 점이다.
또한 그 계산이 어떤 의사결정으로 이어지는지 연결이 없다.
결과는 늘 비슷하다. 표는 만들어지고, 결론은 없다.
 
5) 데이터 분석 흉내
거래처 리스트를 나열해 놓고, 최초 컨택 경로를 가·나·다 각 경우로 분류하라거나, 과거 퇴직한 직원이 컨택한 경위까지 포함해 정리하라는 식의 지시.
이런 행위를 통해 무엇을 배우는지, 어떤 액션을 할 것인지는 머릿속에 없다. 인사이트 없는 분류는 데이터 분석이 아니라 엑셀 꾸미기에 불과하다.
비슷한 부류로는 각 거래처가 새로 생긴 이후로 그들과 관계된 결재 문서를 세부 분류하고, 월별 추이를 뽑고, 업체당 결재 건수를 계산하고, “패턴에 대한 의견”까지 내라고 하는 식.
이를 어쩔 수 없이 무조건적으로 따라야 하는 하급자 입장에서는 어떤 기시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데, 그건 본질적으로 이러한 행위는 데이터 분석을 흉내 내는 사람의 상상을 확인하기 위한 절차일 뿐이라는 점이다.
분석은 질문에서 시작하는데, 질문이 없기 때문.
패턴이 나오기 어려운 데이터에서, ’단지 그냥 해볼까?’라는 호기심과 상상으로 억지로 의미를 뽑으려 하면, 의미가 아니라 기계적 노동만 남는다.
 
6) 노동력 투입의 정도가 곧 일의 완성도
한번의 노동으로 끝날 일도, 의미 없는 추가 노동을 통해 ‘힘든 느낌이 있어야만’ 일을 했다고 느끼는 경우. 전형적인 농업근면성의 예이다.
무조건적인 분류 업무 지시로 사람을 한 번 굴리고 나서 “이 기준으로 다시”하고 지시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본래 의도한 기준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공유했어야 했다. 이러한 행위는 관리가 아니라 체력 소모의 재생산일 뿐이다.
일의 본질에 대한 판단 능력이 없으니 ‘이 정도의 시간은 걸려야’, ‘이 정도 횟수로는 담당자를 돌려보내야’, ‘이 정도의 힘든 느낌은 들어야’ 일이 되었거니 마음의 위안을 삼는 것이다.
또 다른 예로는 다수의 후보군 중 한두개의 pick을 뽑는 단순한 과정도 필요 없는 속성들까지 카테고리를 정의해 후보군을 분류하고, 중요도에 따라 A/B/C로 나누라는 지시 같은 경우가 해당한다.
목적 없는 분류이기에 결국 분류를 위한 분류로 업무가 끝나버린다. 더군다나 이러한 기준이 업계 현실을 모르는 작위적인 기준이라면 더욱 그렇다.
실무자가 이러한 상황을 예상해 이미 평가를 정리해 제출한 경우라면, “ ‘가중’ 상중하 평가도 표시하고, 차이가 나는 부분은 별도 컬러로 표시하라 ”는 식의 지시가 돌아온다. 어떤 업무를 수행했던, 얼만큼 진행되었던 상관 없이 무조건적으로 일에 다시 일을 첨가하는 방식의 지시인 것.
 
7) AI를 사용해도 농업근면성은 남는다
훗날 AGI가 출현하더라도, 개인의 무지에 의한 농업근면성이 남아있다면 자동화와 생산성이 향상된 시대를 절대 누릴 수 없다.
‘ChatGPT 모먼트’가 주었던 시대적 의미는 대중이 생성형 AI를 처음 접해본 순간이라는 것과 더불어, 전 구성원의 생산성이 전반적으로 올라가고, 조직에서는 불필요한 커뮤니케이션 비용을 줄여 효율성을 올릴 가능성을 본 것에 있다.
그런데 일례로 “A와 B 중 무엇이 더 좋을지 ChatGPT에게 입력해보시오. 그리고 보고하시오.”와 같은 지시는 이러한 시대적 의미를 철저하게 무시한다. 적어도 이런 사항은 직접 해보거나, 각자 해본 뒤 빠르게 의견을 교환해 의사결정을 마무리 하는 것이 맞다.
새로운 도구가 나타나면 생산성이 향상되어야 하는데, 그 도구조차도 노동을 늘리는 방향으로 쓰인다.
 

업의 본질을 이해할 용기가 없으면, 노동이 신앙이 된다

업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어렵고 불편하고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한다. 부지런히 업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읽으려 노력해야 하고, 때론 책임을 지고, 실패를 통해 체득되는 경험과 감각도 함께 쌓아가야 한다.
이 과정에 대한 두려움만 앞서면 결국 다른 곳으로 도망간다. 그리고 가장 흔한 도피처가 “열심히 하는 척”이다. 그래서 농업근면성은 무지성 근면함이 된다.
무지성한 근면함이 위험한 이유는, 실제 내면에 쌓이는 것은 없음에도 “나는 성실하다”는 확신을 얻기 쉽기 때문이다. 불안을 잠재우기에는 이만한 약이 없다.
문제는 그 약의 부작용이 조직에 남는다는 점이다. 의사결정 속도가 느려지고, 우선순위 감각이 사라지며, 실제 학습은 일어나지 않는다.
 
Share article

SUDO